미래문화자산 여행코스

신들도 찾아오는 물멍길을 품은 마을

대포마을

바다면 바다, 산이면 산, 숲이면 숲! 대포마을은 제주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마을이예요. 한라산 중턱부터 바다까지 길게 쭉~ 뻗은 지형적 특징 때문이죠. 보물같은 비경이 가득한 대포마을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길은, 해안을 따라 걷는 물멍길! 대포의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면 환상적인 비경과 함께 소중한 유물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대포해안에 가끔 신들이 찾아온다’ 대포마을의 해안길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김순이 시인은 이런 표현까지 썼을까요? 신들도 찾아온다는 대포마을로 떠나볼까요?

  • 배튼개주상절리

    ‘배튼개’는 배를 띄운 바다를 뜻한다. 실제로 과거에 중국으로 진상할 말을 이곳에서 배에 실어 보냈다고 전해진다. ‘배튼개주상절리’는 대포마을을 대표하는 주상절리로, 대포해안 서쪽에 지삿개가 있다면 동쪽에는 이 배튼개가 있다. 대포포구로부터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형성되어, 바다와 맞닿은 높이 10~15m 가량의 수직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펼쳐져 있다. 파도의 침식에 의해 평탄화 된 해안지형인 파식대(波蝕臺)가 잘 발달해 있으며, 해안에서 바다로 길게 돌출된 암반 ‘궤기난덕’은 그 이름처럼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해서 지금도 많은 낚시꾼들이 찾고 있다.

  • 소금빌레

    빌레는 제주말로 ‘너럭바위’를 말한다. 소금빌레는 즉 소금을 생산하던 돌염전을 뜻하는데, 대포마을에서는 배튼개 바다 앞의 넓고 평평한 바위를 이용해 소금을 얻었다. 바위에 바닷물을 끼얹어 증발시킨 후 염도가 높아지면 이 물을 다시 솥에 넣고 끓여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1960년대까지 돌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소금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제주 지역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생활문화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 대포포구

    대포포구는 지금은 그 규모가 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큰 포구를 뜻하는 대포라는 이름처럼 옛날에는 당나라와 교역을 할 만큼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항구였다. 천연적으로 배가 드나들거나 머물기 좋은 항구의 요건을 갖춘 데다, 그 앞으로 북서태평양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해양 진출에 최적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대포마을은 예로부터 해양 교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최근에도 연근해 및 동중국해로 진출하는 어선들의 어업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주변에는 주상절리가 펼쳐진 해안과 약천사가 자리 잡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 개바위

    대포포구에서 방파제 쪽으로 내려다보면 강아지처럼 생긴 바위를 볼 수 있다. 대포동의 마을 상징석으로 속칭 ‘개바위’라 불리며 밀물 때는 머리만 보이고 썰물 때가 되어야 전체 모양을 드러낸다. 독특한 모양 때문에 도둑을 맞은 일도 있었는데, 자연석 전문 밀반출업자가 밤사이 크레인까지 동원해 훔쳐간 것이다. 개바위는 이후 한 과수원에 숨겨졌다가 다행히도 제주해양경찰청이 수사에 나선지 3일 만에 발견되어 다시 대포 바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도대불

    도대불은 제주 지역에서 야간에 배들이 무사히 귀항할 수 있도록 항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던 민간등대이다. ‘도댓불’ 또는 ‘등명대(燈明臺)’라고도 불렀으며, 전기가 각 마을에 보급되어 현대식 등대가 포구 곳곳에 설치되기 전까지 어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하였다. 대포의 도대불은 대포포구 주차장 입구 쪽 소나무 아래에 위치해 있다. 보통 도대불의 형태는 원뿔형, 원통형, 사다리꼴, 상자형, 표주박형 등 다양하며 대포동의 도대불은 밑에서부터 중간까지는 사각뿔대 모양이고 중간 윗부분은 사각기둥 모양으로 첨성대를 연상케 한다. 제주의 도대불은 현재 상당수가 사라져 남아있는 도대불은 10여 곳에 지나지 않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대포동의 도대불이다. 이곳을 오가는 선박들의 안전을 위해 1942년 경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도대불을 만들었다. 현무암과 시멘트 콘크리트를 혼합하여 여러 층으로 쌓았고, 상단에는 철제 구조물을 설치하여 불을 밝힐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으로 4개의 구멍만 남아 있다.

  • 개당

    ‘개당’ 혹은 ‘어부당’이라고 불리며 큰개(대포)에 있는 당이라 해서 ‘대포동큰갯당’으로도 부른다. 대포동 도대불에서 큰길 쪽으로 가다 보면 바위가 드러난 곳에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당의 위치이다. 개당할망 또는 선왕대신(船王大神)이라는 선박수호신을 모신 당으로, 어부와 해녀들이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를지내던 곳이다. 1990년경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조업하다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요왕맞이 굿을 이곳에서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 옛 대포동 전경초소

    중문단지축구장 주차장에서 해안선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독특하고 낡은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전경초소’로 사용된 곳이다. 1960년대부터 오랜 세월 제주의 해안 경비를 담당하였으며, 공식적으로 2021년도에 업무를종료하였다. 그 후 한동안 유휴시설로 남겨지는 듯 했으나 서귀포문화도시센터의 문화도시 조성사업을 통해 서귀포의 문화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 코짓개해안

    대포마을 바다에서 가장 튀어나온 해안이다. 코지는 바다로 돌출된 곳을 뜻하는 제주어로, 코짓개해안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멀리 범섬, 송악산, 가파도, 마라도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 포구의 천연방파제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제주에서도 드넓은 수평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현무암의 특이한 모양에서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서귀포의 숨은 보석 같은 장소이다. 또한 코짓개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김순이 시인의 ‘대포해안에서’ 시비도 만나볼 수 있다. 시인은 ‘이곳에 신들이 찾아온다’,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과 같은 표현으로 대포해안의 절경을 극찬하였다.

  • 도릿발해안

    대포연대 아래쪽의 해안으로 이 일대 바닷가를 도릿발이라고 한다. 나지막한 암반이 줄줄이 바다쪽으로 뻗어나가 그 형상이 마치 다리와 같다고 해서 다릿발 혹은 도릿발로 불렸는데, 발음되는 소리 그대로 표기한 도리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포마을 해녀들이 지금도 물질을 하는 곳이며, 밀물 때 들어온 물이 썰물 때 갇히는 천연적인 원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하고 또 주변 경치가 빼어나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이다. 한때는 아는 사람들만이 알음알음 찾던 숨은 명소였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스노클링 명소로도 소문이 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 대포연대

    연대는 구릉이나 해안 연안에 위치하여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연기나 횃불 등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군사적 통신수단을 말한다. 대포연대는 대정현에 소속된 연대로서 대포동 해안과 접한 25m 벼랑 위에 축조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마희천 연대, 서쪽으로는 별로천 연대와 교신하였고 지형이 주위보다 밖으로 돌출되어 있고 높은 곳이라 강정동 앞바다에서 대평리 앞 해안까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 조선시대 때 대표적인 군사시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관리 소홀로 무너지고 소실 돼 기초석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1996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며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중문대포주상절리

    ‘신들의 궁전’이라 일컬어질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옛 지명인 ‘지삿개’를 살려 ‘지삿개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귀포시 중문동과 대포동 해안을 따라 분포된 주상절리로, 현무암질 용암류가 식는 과정에서 형성된 높이 20m 내외의 검붉은 육각형 돌기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화산 용암이 굳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지질 현상을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교육적 가치가 뛰어나 2005년 1월6일 천연기념물 제443호로 지정됐다. 2006년 12월에 문화재보호구역으로,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도 지정됐다.

  • 잠녀당

    대포포구에서 바다의 오른편에 있는 언덕을 올려다보면 ‘자장코지’라고 하는 길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 무리를 볼 수 있다. 마치 일렬로 바다를 향해 잠수하려는 모습처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자장코지의 바위 중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곳이 바로 ‘잠녀당’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마을 해녀들이 바다의 풍요와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치성을 드렸던 곳이다.

제주의 첫 햇빛이 가닿는 마을

오조리

제주의 동쪽 끝, 옛 제주의 정취를 가득 품고 있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나 오, 비출 조. ‘나를 비춘다’는 뜻을 가진 오조리인데요, 오조리는 그 뜻처럼 동쪽의 햇빛이 가장 먼저 가닿는 마을이예요. 동쪽에서 떠오른 햇빛은 가장 먼저 마을을 지키고 있는 식산봉을 휘감은 뒤, 호수처럼 잔잔한 내수면을 반짝이게 합니다. 그리곤 넓게 펼쳐진 연안습지의 철새들에게 다가가 황홀한 날개짓을 독려하죠. 제주 최초의 양어장 주변의 멋진 산책로와 구불구불 돌담사이까지 햇빛이 가 닿으면 사람들의 평화로운 산책이 시작되는데요. 제주의 첫 햇빛을 품은 오조리로 떠나볼까요?

  • 오소포 연대

    연대는 구릉이나 해안 연안에 위치하여 적의 침입 시 연기나 횃불 등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군사적 통신수단이었다. 1947년부터 시작해 제주의 38개 연대 중 23곳이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고 그중 오소포 연대는 1996년 7월 18일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오조리는 왜구의 침입이 잦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오소포 연대에는 수산진 소속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교대로 지켰으며 동쪽으로는 성산 봉수대를 거쳐 남쪽의 협자 연대와, 또 북쪽으로는 종달 연대와 교신하였다. 지금의 연대는 최근에 보수한 것으로 계단을 올라 연대 위에 서면 불을 피웠던 터와 함께 오조리의 드넓은 바다와 우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오조리 양어장

    오조리 양어장은 식산봉을 배경으로 오조리 동쪽 내수면 일대에 위치해 있다. 뚝 길이 182m, 높이 4.5m, 넓이 4m, 수문 2개소의 양어장이다. 1961년 오조리 청년회가 5·16군사정변 직후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양어장 시설을 건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양어장은 마을 공동 소득을 위한 개발사업으로 마을 주민 2,500여 명이 식산봉의 흙과 돌을 직접 날라 석축을 쌓고 성토하여 제방을 구축했다. 착공 후 완공까지는 4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무엇보다 자립마을을 만들고자 하는 주민들의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당시 양어장에서는 숭어와 뱀장어를 주로 키웠다.

  • 장정의보

    오조리 양어장 안의 둑방을 장정의보라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정의군수였던 장용견이 양어장을 만들 목적으로 둑을 쌓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장정의보는 돌담을 쌓아 보를 만들고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밀물에 들어온 고기를 가두는 어로시설로, 옛 선조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제주 최초의 양어장이다.

  • 오조포구

    성산갑문 안쪽 깊이 위치한 오조포구는 쌍월동산과 식산봉이 바람을 막아주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 잔잔한 내수면과 아늑한 식산봉, 잘 갖춰진 둘레길 산책로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오조 연안습지의 철새들, 그리고 신비로운 성산일출봉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자아낸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이곳 오조포구에 수전소가 설치되어 관리와 군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또한 조선(造船) 기술에 능한 목수들이 상주하며 크고 작은 선박들을 만들었기에 다른 해안 마을에서는 쉽게 접할수 없던 ‘적판’과 ‘쌈판’ 등 옛 선박명이 아직도 전해진다.

  • 오조포구 앞 옛 돌창고

    오조포구에 위치한 마을 소유의 옛 돌창고이다. 과거에는 노, 닻, 키 등 선구(船具)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된 곳이다. 2016년에는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촬영지로 식산봉, 성산일출봉과 함께 아름다운 배경이 입소문을 타며 많은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창고는 다시 방치되며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듯 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예술가들과 제주도립미술관 사회예술프로젝트를 통해 새 단장을 하게 되었다. 오조리를 찾는 방문객에게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마을 경제를 살리려는 취지에서였다. 이때 돌창고는 ‘오조리 감상소’라는 새 이름을 얻고 프로젝트 기간 동안 음악, 영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다시금 마을을 알리는 공간으로 주목받았다.

  • 족지물

    족지물은 오조리 마을의 용천수이다. 오조리는 제주에서 네 번째로 용천수가 풍부했던 마을로 족지물 외에도 진모살물, 수전, 주근디물, 엉물, 샛통물 등 12개의 물통(우물)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사용되며 남아있는 곳은 족지물이 유일하다. ‘족지’는 생긴 모양새가 마치 발가락처럼 길게 뻗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원래는 식수용과 우마급수용으로 나눠 이용하다가 이후 남탕과 여탕으로 나누어 쓴다고 한다. 넓고 얕은 위쪽이 여탕, 깊고 좁은 아래쪽은 남탕이며, 맨 위쪽은 채소를 씻거나 음용수로 사용되었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이 주변을 족지동네라 부르기도 한다.

  • 우뭇개 동산

    성산일출봉의 북서쪽 능선, 매표소 맞은편에는 ‘우뭇개 동산’이라 불리는 풀밭이 있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제주 4·3 사건의 아픔이 서려있다. 1949년 1월 2일 오조리 주민 20여 명이 ‘다이너마이트 사건’으로 이곳에서 집단 총살을 당한 것이다. 해방 후 제주에서는 일본군들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를 고기잡이용으로 사용하였는데, 1948년 겨울부터는 각 마을마다 민보단을 꾸리면서 인민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해 마을을 지킬 목적으로 초소에 다이너마이트를 두게 된다. 당시 제주에 주둔해 있던 9연대도 마을 경비를 위한 주민들의 다이너마이트 사용을 허가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른 채로 임무를 교대해 제주에 들어온 2연대와 서북청년회는 이 다이너마이트로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며 마을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 감자 창고에 감금했다. 그리고 4인 뒤인 1949년 1월 2일 오조리 주민 20여 명이 누명을 쓴 채 우뭇개동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하였다.

  • 조개왓

    ‘왓’은 ‘밭’을 뜻하는 제주방언으로 조개왓은 조개와 보말 등이 풍부한 ‘조개 밭’이란 의미이다. 오조리 동쪽 내수면에 넓게 펼쳐진 제주 유일의 갯벌로, ‘통알밭’으로도 불리고 흔히 ‘오조리 갯벌’로 칭하기도 한다. 과거 오조·성산·고성리 어민들의 생업 공간이기도 했으며, 지금은 매년 여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조개잡이 체험장으로도 유명하다. 해양생물이 풍부해서 천연기념물인 멸종위기야생생물 1급인 저어새, 황새, 매와 고니, 흑기러기, 항라머리검독수리 등 총 196종의 새들이 관찰되는 곳으로, 2023년 12월 21일 해양수산부로부터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는 연안 습지를 터전으로 삼는 멸종위기 철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식지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제주 최초 사례이다.

  • 쌍월동산

    성산에서 달을 관측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오조리 내수면을 두고 식산봉과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다. 밤하늘에 달이 뜨면 내수면에도 달이 투영되어, 동시에 두 개의 달이 비춘다는 의미로 쌍월동산이라 불렀다.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던 과거 오조리 주민들은 뱃일을 나가거나 먼 길을 떠날 때면 이곳에 옥돔과 삶은 계란, 밤 등을 가져다 놓고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고 한다.

수리수리 수상한 솥 굽는 마을

덕수리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제주. 어느 마을을 가도 다양한 신화와 신앙을 만날 수 있죠. 그 중 도채비(도깨비) 신앙으로 유명한 마을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바로 우뚝 솟은 산방산 아래 자리잡은 덕수리인데요, 왜 하필 도채비 신앙일까.. 덕수리는 도채비 신앙 뿐만 아니라 불미(풀무)공예가 유명한 곳으로 대장장이의 마을, 솥 굽는 마을로도 불립니다. 바람을 일으켜 녹인 쇳물로 솥이나 농기루를 만드는 것을 불미 공예라고 하는데요, 밤새 떼던 고열에 녹아 벌겋게 된 쇳물이 저 아래 해변마을에선 볼 땐 꼭 도깨비불들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을까요 도채비 신앙이 신비로운 솥 굽는 마을, 덕수리로 떠나볼까요?

  • 도채비 신앙 (옛 옹기굴 터)

    ‘도채비’는 도깨비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제주에는 도깨비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본향당과 마을들이 있는데, 안덕면 덕수리가 그중 한 곳이다. 덕수리의 도채비 신앙은 이 마을의 불미공예 기술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불미(풀무)를 이용해 솥과 농기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밤새 피어오르던 불꽃과 고열에 녹아 벌겋게 된 쇳물이 도채비불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덕수리의 옛 이름인 ‘새당’도 도채비를 모시는 당이라는 뜻이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어느 집안에 불운이 계속되면 ‘그 집은 도채비 잘못 위하지 아니하여신가’, 집안이 잘 되면 ‘저 집은 도채비 잘 위하여신가’ 했다고 한다.

  • 곶바구리

    곶바구리는 꽃바구니가 변형된 말로, 동부락에 위치한 물통(우물)의 모양이 꽃바구니를 닮았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덕수리와 같은 제주 중산간 마을의 물통은 해안가에서 단물이 솟는 용천수(湧泉水)가 아닌 빗물이 고이는 봉천수(奉天水) 물통이었지만, 물이 귀했던 과거에는 봉천수도 중요한 수원이었다. 자연히 덕수 마을에 맨 처음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것도 이 곶바구리 물통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물의 양도 꽤 많아서 식수로 쓰는 물통과 소 먹이고 목욕하고 빨래하는 물통으로 나누어 썼다. 이는 덕수리 마을 외곽에 위치해 지금도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물통 중 하나로, 한때 공사가 이뤄진 적이 있어 아쉽게도 지금 모습에서는 꽃바구니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 흘왓

    흘왓은 흙이 있는 곳에 흙탕물이 항상 고여 있는, 일종의 돌 웅덩이다. 그 자리에 수초 종류의 풀이 자라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잘 닦고 정비해 물통(우물)으로 만들어 썼으며 초기에는 식수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소 먹이는 급수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신기하게도 논에 모를 내고 물을 내는 시기에는 우윳빛처럼 물이 불투명해졌다가 논에 물을 내는 일이 끝나면 다시 투명해지며 이전의 색깔로 돌아왔다고 한다.

  • 말방아집

    제주에서는 곡식 도정을 위해 ‘말방아’를 사용하곤 했다. 즉, 말방아집은 말(馬)의 동력을 이용하는 제주의 연자방앗간을 의미한다. 마을 내에서도 여러 길이 교차하는 중심거리에 주로 위치하였으며, 지붕은 띠로 이은 후 바둑판처럼 줄로 얽어매었고 벽체는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돌담을 쌓는 식으로 제주도 특유의 가옥형태에 따라 만들었다. 말방아의 바탕돌과 윗돌은 보통 산이나 바닷가, 들판, 냇가 등지에서 석공을 빌어 다듬은 뒤 마을까지 끌고 와야 했는데 이때 마을 청년들이 동원되었다. 아쉽게도 현재 덕수리의 방앗돌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마을의 돌담과 집들을 유심히 보다보면 옛 방앗돌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다. 또 덕수리에는 돌로 만든 물탱크가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돌 조각들 역시 한때는 마을사람들이 곡식을 찧기 위해 찾았던 말방아집의 방앗돌로부터 깨어져 나온 것들이다.

  • 포제단

    유교식 마을제인 포제를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포제단이 자리 잡은 알숭물 동산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정상부에 소나무가 있고 널찍한 공간이 마련돼 있어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본래는 마을 북쪽에 있었으나 100여 년 전 현 위치로 옮겨 제단을 만들었다. 덕수리에서는 지금도 유교식 마을제를 별제(別祭), 별포제(別酺祭)라 하여 지내고 있다. 제일은 입춘 뒤 처음 맞이하는 정일(丁日)이고 제사의 대상은 이사(里社), 태세(太歲), 별성(別星) 등 세 신위(神位)이다. 제관들은 제일이 다가오면 사흘 동안 제청에서 머물며 재계를 시작하는데, 이 기간 동안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제사를 지내기 전후로 꿩이나 말 소리가 들리면 길한 것, 소 울음소리가 들리면 흉한 것으로 여긴다.

  • 방사탑

    제주에는 예로부터 액막이를 위한 다양한 방사의식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 방액(防厄)·방사(防邪)의 의미를 지니는 방사탑을 세웠다. 덕수리 방사탑은 오래 전 동동네(큰 가름)가 형성되었을 때 풍수지리를 잘 아는 지관이 마을 서북쪽과 동남쪽이 허하여 사악한 기운이 마을에 비친다 하여 총 3기의 탑을 세웠다. 특이점은 탑의 꼭대기 부분에 남근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마을 북쪽에 ‘웃배량’, 남쪽에 ‘알배량’이라 불리는 큰 암석이 있는데 그 모양이 여성의 성기 모양을 닮아 마을에 음기가 강하니 양기를 강화시켜주는 방법으로 남근석을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4·3 때 긴 성담을 쌓다가 방사탑이 허물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마을 남성들이 장수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2004년에 방사탑을 다시 복원하자 그 후로는 마을의 남성 어르신들이 장수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 신령스러운 낭과 구름 폭낭

    신령스러운 낭은 도리못 근처에 있는 유명한 폭낭(팽나무)으로, 신령스러운 낭이라 불린다. 비록 지금은 죽은 나무가 되었으나, 과거에는 가지의 동쪽에 먼저 싹이 나면 마을 동쪽에 풍년이 들고, 남쪽으로 나면 남쪽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덕수리의 동동네와 서동네의 풍년을 점쳐주었다. 구름 폭낭은 커다란 뭉게구름처럼 나무의 수형이 웅장하고 또 가지가 풍성해 구름 폭낭(팽나무)이 이름이 붙었다. 태풍 피해로 가지가 부러지면서 현재는 그 규모가 많이 작아지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나무를 ‘구름 폭낭’이라 부른다.

  • 종대거리

    종대거리는 덕수리 동동네의 중심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동동네가 큰가름으로 불리던 시절, 이곳에 탑을 세워 종각을 만들고 종을 달아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종을 쳐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대처하였다. 보다 긴밀한 연락체계의 필요성을 느낀 마을 청년들이 주도해 만들었으며, 처음에는 종을 달았지만 나중에는 사이렌도 달았다고 한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형태가 남아있었는데 새마을사업으로 도로가 확장되며 철거되었다가 201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오래 전, 길에 종대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이곳을 ‘잽힌막거리’라 불렀다. 길이 워낙 마을의 중심에 있다 보니 이곳에 있으면 누가 어디로 지나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딱 잡힌다는 의미에서였다. 지금도 마을 어디를 가든 꼭 이 곳을 지나가게 되어있다고 한다.

  • 뜸돌거리

    ‘뜸돌’은 들어 올리는 돌이라는 뜻을 지닌 ‘들돌’의 제주 방언이다. 과거 제주에서는 성년의례로 마을마다 청년들이 모여 ‘뜸돌들기’를 하며 힘겨루기를 했다. 뜸돌은 대개 바닷가에서 원형에 가까운 무거운 돌을 구해서 마을 어귀나 나무 아래 두었으며 이 뜸돌이 있는 거리를 뜸돌거리라 불렀다. 덕수리에도 뜸돌과 뜸돌거리가 있었는데 덕수의 뜸돌은 작은돌, 중돌, 큰돌(목돌)로 모두 3개가 있었다. 그중 재밌는 것은 각장 작은 돌로, 덕수리 사람들로부터 ‘다른 마을 사람 골리는 뜸돌’로 불렸다. 크기는 작지만 모양이 특이해서 돌을 안았을 때 중심잡기가 은근히 힘든 돌이었는데, 이를 알 리 없는 다른 마을 사람들은 작다고 만만히 보고 대뜸 돌을 들었다가 이내 고꾸라지곤 했던 것이다. 이후 뜸돌은 시대가 변하고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치워지다 지금은 중돌 하나만 남아 마을회관 한 편에 보관되어 있다.

  • 화단집

    ‘화단’이란 초상을 치를 때 시체를 장지로 운반하는 도구로 ‘상여’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보통은 마을에 화단계가 조직돼 있어서 공동으로 돈을 모아 화단을 사고, 마을 근처에 화단집과 영안실을 지어 화단과 그에 딸린 여러 도구를 보관했다. 장례를 치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힘을 합쳤던 것이다. 덕수에는 아직 그 화단집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물론 지금은 이전의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고 건물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굽이굽이 물길이 빚어낸 마을

하례리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이 된 효돈천과 천연보호구역인 신례천. 소중히 보호되고 있는 두 물길 사이에 한 마을이 존재합니다. 바로 효돈천과 신례천 사이에 자리잡은 하례리인데요. 역시나 생태마을로 선정돼 그 소중한 가치를 존중받고 있습니다. 하례리가 또 한가지 특별한 이유! 바로 정령마을로 불린다는 건데요, 풀 한포기, 바람 한 자락, 나무 한 그루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주민들은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호하며 하례리를 정성껏 생태마을로 가꿔가고 있습니다. 굽이굽이 물길이 빚은 하례리로 떠나볼까요?

  • 고살리 상수원

    고살리샘은 하례마을의 상징으로 냇가 서측변 바위틈에서 사시사철 샘물이 솟아나온다. 1952년부터 정부에서 이곳을 수원지 삼아 하례리 일대를 논밭으로 만들려고 수로와 저수지 공사를 진행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966년에는 하례 1·2리 전체 상수도 수원지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요즘은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 어캐할망당

    과거 이 주변에 영천관이 있었고, 말을 점고하던 점마소가 있었다. 점마소에 큰 당산나무가 있어 주민들은 그 나무 아래서 우마를 잘 기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당을 어케할망당이라고 한다. 당 주변에는 과거에 여인들이 출입하는 폭 1m남짓한 좁은 올레가 지금도 남아있다. 당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 금물과원

    임금에게 진상 되었던 귤을 키웠던 곳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하례에 위치한 금물과원에서 생산된 감귤이 고려 문종 6년(1052년)이전부터 제주의 특산품으로 임금께 진상되었다. 당시 감귤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바치는 과실이자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왕이 내리는 하사품이었다. 조선은 귀한 감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금물과원이라 명하고 감귤나무를 특별히 관리했다. 하례리에 위치한 금물과원은 제주 과원 중 가장 먼저 설치되었으며 가장 오랫동안 운영되었던 곳이다.

  • 걸서악 산책로 전망대

    하례1리에 위치한 오름으로 오름의 서쪽기슭으로 효돈천이 지나간다. 2개의 화산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걸세오름이란 이름은 산 모양이 마치 문을 걸어 잠그는 걸쉐(걸쇠)모양으로 생겼다 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은 180m정도로 부담없이 오를 수 있으며, 하례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로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이다. 오름의 북동쪽 큰 봉우리의 비탈 대부분은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고, 1960년대에는 비석을 만들기 위한 채석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 효돈천 남내소

    한라산에서 서귀포 바다에 이르는 13km 하천인 ‘효돈천’은 난대식물대, 활엽수림대, 관목림대, 고산림대 등 한라산 식물군이 모두 존재하는. 특히 법적으로 보호받는 한란, 돌매화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으며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효돈천에서 가장 크고 넓은 소로 알려져 있는 남내소엔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전설이 있다. 하효마을의 부잣집 외동딸과 머슴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정을 쌓다가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의 벽에 부딪혔고 결국 남자는 남내소에 몸을 던졌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여자는 그를 찾기 위해 비를 내려달라 100일간 기도를 올렸는데 거짓말처럼 큰 비가 내리며 남자가 떠올랐고 여자는 죽은 남자를 꼭 부둥켜안은 채 남내소에 몸을 던졌다. 그 후 마을에서는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할망당을 지어 제를 지냈다고 한다.

  • 양하진 선생 공덕비

    양희진 선생은 하례1리에서 태어나 1926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기업도 경영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선생은 성금을 희사해 하례초등학교의 과학관을 건립하고 시설 및 비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마을복지회관 사업비, 새마을 사업비 등에도 도움을 주었다. 재일 제주인의 개척정신과 고향사랑을 보여주는 사례다.

  • 하례초등학교 옛 터

    하례초등학교는 1946년 개교한 뒤 1949년 4‧3사건으로 건물이 모두 전소되었다. 이후 주민들의 노력으로 학교가 재건됐고 1975년 현 위치인 하례리 326번지로 이전했다. 하례초등학교 옛터(하례리 506번지)는 사유지가 됐지만 오래된 관사가 남아있다. 하례초등학교 초창기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다.

  • 소귀나무 보호수

    소귀나무는 양지바른 하천 부근에서 높이 5~15m 정도로 자라는 상록 활엽수로 세계적으로 중국,타이완, 일본, 필리핀과 우리나라에선 제주 일부지역에 분포한다. 소귀나무는 번식이 매우 어려운 종으로 알려져 있고 제주도내에서도 자생지가 매우 제한적인데 효돈천과 신례천이 소귀나무의 대표적인 자생지로 알려져 있다. 하례1리 마을 입구에 위치한 소귀나무 보호수는 수령 100년이 넘은 나무로 마을의 상징으로 귀하게 보호받고 있다.

  • 망장포

    사람과 물자가 드나들던 전통포구이다. 고려 말 몽고 지배 당시에는 중산간 지역의 목마장에서 키운 말이나 세금으로 거둬들인 물자 등의 진상품을 원나라로 실어 나르는 조공포의 역할도 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이곳에 봉화대가 있어서 망장포(望場浦)라 불렸다는 설도 있고, 그물을 많이 치던 대표적 포구라는 의미에서 ‘그물 망(網)’자와 ‘벌일 장(張)’자를 써 망장포(網張浦)로 불렸다고도 한다. 제주도내 여느 포구와는 달리, 조수간만의 차를 감안해 선착장에 3~4단의 돌계단이 오밀조밀하게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배를 언제든지 댈 수 있도록 포구의 쓰임새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던 옛 제주 도민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중산간 삶의 속살을 품은 마을

신례리

예를 존중하는 마을이란 뜻의 예촌. 신례리의 옛 이름입니다. 신례리는 이승악과 기생화산, 길게 뻗은 신례천을 품고 있는 중산간에 위치해 있는데요, 자연생태우수마을로 선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신례리의 보물인 신례천 생태로를 따라 걷다보면 용암으로 만들어진 기암괴석, 태고의 분위기가 가득한 깊은 계곡, 또 온갖 종류의 상록수림을 만날 수 있는데요, 그야말로 감추어진 제주 자연의 속살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공동목장이나 돌담, 숯가마 터 같은 제주의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는 삶의 흔적들도 만나볼 있는데요. 중산간의 속살을 품은 신례리로 떠나볼까요?

  • 이승악 삼나무길

    살쾡이를 닮아서 이승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승악 오름은 동쪽으로 움푹 파인 말굽 형태의 지형을 가지고 있지만 능선에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로 인해 정확한 생김새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봄철엔 진입로 2~3km의 구간에 환상적인 벚꽃길이 펼쳐진다. 등산로 앞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10분 정도 들어가면 한라산 둘레길 ‘수악길’로 접어든다. 그 길목 초입에 아름다운 삼나무 숲길이 등장한다.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길의 숨겨진 비경을 여유롭게 만끽할 수 있다.

  • 이승악 숯가마터

    제주도의 화전 취락은 일시적인 도피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자급자족형, 정착형의 성격을 띠었다. 공마제도가 폐지되면서 국영 목장을 방치하기보다 목장 내에서의 화전 경작을 허용하면서 1920년대에는 도내 화전민이 4,20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1930년대 화전을 금지하면서 화전민은 사라졌고 삶의 흔적만 남아있다. 이승악의 숯가마터는 일제 강점기에 표고버섯 건조장의 부대시설로 일제에 고용된 조선인들이 일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고단했던 시절 민초들의 삶의 흔적이자 일제의 수탈현장이기도 하다.

  • 해그문이소

    용천수나 강물이 아닌, 빗물로 형성된 연못이다. 그럼에도 그 수량이 풍부하여 제주도에 흔치 않은 연못이라 할 수 있다. 물이 귀한 중산간 지역에서 이처럼 수량이 많은 연못의 존재는 주변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되었다. ‘해그문이’라는 말은 나무가 울창하고 하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밝은 대낮에도 해를 볼 수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처럼 하천 아래로 발을 디디면 높은 절벽 위로 하늘 높이 뻗은 구실잣밤나무가 숲터널을 이뤄 하늘을 뒤덮고 있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압도적이며 마치 깊은 원시림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주는 장소이다.

  • 신례천

    신례천은 한라산 진달래밭 일대에서 발원하여 공천포 해안으로 유입되는 물길이다. 평상시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 상태이며 대부분은 천연보호구역으로 소귀나무, 황칠나무 등 희귀한 식물들이 서식한다. 신례천변으로 생태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을 하면서 평소 보기 힘든 식물들과 나무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 일궷당 (남밑 할망당)

    나무 아래 할망을 모신 당이라는 의미이다. 제일은 7· 17·27일(일뤳당)이다. 집에 시험을 앞둔 학생이 있거나 아픈 사람이 있으면 여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주민들은 설명한다. 지금은 찾는 사람이 없고 흔적만 남았다.

  • 네커리 폭낭

    ‘네커리’는 사거리를 의미하며 마을의 중심에 있는 폭낭 두 그루로, 예전에는 폭낭 아래 돌 평상이 있었다. 이 폭낭 아래서 주민들이 더위를 식혔고 길을 가다가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 신례리는 1974년 새마을운동 모범 마을로 선정됐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해 이곳에서 주민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곳에는 마을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공동수도의 흔적도 남아 있다.

  • 천수왓 올레

    올레란 대로에서 집까지 연결하는 골목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제주에선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전통 주거 구조이다. 신례마을에는 약 120m의 길이를 가진 천수왓 올레가 남아있는데 제주에서 가장 긴 올레로 추정된다. 올레의 양옆으로 쌓은 올렛담은 가장 아래에 작은 돌을 쌓고 그 위에 큰 돌을, 맨 위에 중간 크기의 돌을 쌓은 형태이다.

  • 양금석 초가

    신례마을 양씨 종가댁으로 제주 전통 초가 양식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가옥이다. 600평의 넓은 대지에 세커리(세 칸 집)의 가옥이 위치한다. 집 둘레에 돌담을 둘렀고, 집 앞쪽에는 밀감밭이 펼쳐져 있다. 부모 세대가 거주하는 안거리(상방, 큰방, 정지, 물팡)와 그 맞은편에는 혼인한 자녀가 분가해 거주하는 밖거리(상방, 정지)가 각기 일자로 놓여 있고 안거리와 밖거리가 일자로 위치한 사이에 곡물을 보관하는 모거리가 위치한다. 제주도만의 다양한 공간구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임과 동시에 제주도의 부유한 집안의 가옥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지어진 100년이 넘은 초가로 제주특별자치도의 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 공천포 산이물

    공천포는 신례2리의 포구 이름이자 이 포구 일대에 형성된 동네이름이다. 공천포 산이물은 신례1리 효돈천에 있는 용천수로, 물이 귀하던 시절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산이물은 여름에 인근 마을 주민들이 냉수욕을 하는 피서지로 각광받는다. 남탕과 여탕이 암묵적으로 나뉜다.